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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유즈미 선배, 저와 교제해주세요."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졸업식 오전의 옥상. 또렷한 소년의 목소리가 고막으로 직행해 긴장하고 있던 대뇌를 거칠게 두들겼다.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도련님의 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욱하고 치고 올라왔지만, 여기서 거절한다고 해서 우리의 관계가 정말 끝날 리가 없었다. 신형 식스맨이랍시고 라쿠잔 농구부 레귤러에 끌어들였던 그 현란한 말솜씨를 발휘해서, 나를 반드시 본인의 품으로 끌어들이겠지. 이제 패배를 모르지 않는 제왕님께서는 포기만큼은 여전히 모를 분일테니까, 주제 파악과 상황 인식이 빠른 내가 너른 마음으로 받아주기로 했다 이 말씀.

  "뭐, 나쁘지 않은 제안이네."

  아카시 세이쥬로가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로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 * *

 

 

  졸업식 이후 바로 맞이한 토요일에 우리는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다. 라인으로 약속을 정하고 점심을 먹고 거리를 조금 거닐다가 영화를 보고 헤어지는, 사귀기 이전에도 아카시와 함께 해본 적 있는 평범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인의 데이트구나’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관에서 내 손등 위로 살며시 포개오던 아카시의 손바닥의 온기 때문이었다. 깍지까지는 끼지 못하고 피부를 조심스레 문지르다가 이내 손을 떼어내려는 움직임에 내가 먼저 손을 뒤집어 아카시의 손을 맞잡았다. 살짝 당황한 듯 굳었던 손이 곧 풀리고 되려 나보다 더 손을 꽉 쥐는 아카시의 태세전환에 피식 웃었다. 얼굴을 쳐다보기에는 민망할 것 같아서 시선은 계속 스크린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영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스탭롤이 다 올라갈 때까지 쥐고 있었던 손바닥의 뜨거운 온도와 단단한 감촉만이 기억에 남았다.

  첫 키스는 두 번째 데이트에 했다. 말이 두 번째 데이트지,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에 또 만났다. 전날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손의 느낌이 아직 남아있어서였을까. 신체접촉의 단계를 뛰어오르는 일은 무척 쉬웠다. 아카시가 예약을 잡아 둔 프라이빗이 보장되는 카페의 한 구석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가락을 얽어 잡았다. 마주친 눈빛 속에서 서로의 동의를 읽었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다가오는 입술이 낯설었던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아카시도 키스할 때는 눈을 감을까?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아카시의 눈꺼풀에 닿은 순간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이 나를 덮쳤다. 절로 눈이 감겼고 오로지 입술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맞닿은 면적의 압력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피부 위에 엉켜 드는 감각에 익숙해질 즈음, 아카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혀가 빼꼼히 나와 내 입술 사이를 훑어 벌리며 정신을 쏙 빼놓기 전까지 생각했다. 도련님은 내리깐 속눈썹도 참 예쁘구나, 라고.

  그래. 막연하게 생각했던 아카시와의 키스가 생각보다 너무 기분이 좋았던 것이 문제였다. 카페에서 혀를 얽는 키스를 처음 해보고 붕 떠오른 기분으로 저녁을 먹었다. 내 평생 첫 키스였다. 첫 키스로 아카시와 혀를 섞었다. 부드러운 혓바닥이 내 혀를 끌어당겼고 혀끝으로 문질러지는 곳마다 기분이 좋아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처음 입천장을 문질러줄 때는 부드럽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두 번째로 닿을 때부터는 간지러운 감각에 닿는 순간마다 배꼽 근처가 저릿했다. 상대방의 다음 동작이 예상되지 않으니까, 어떤 방어 동작도 취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아카시조차 나의 반격을 방어하지 못했다. 서로를 향한 공격만이 계속되는 상황인데도 혀도 입술도 모두 부드럽고 말랑거려서 기분이 정말 좋았다. 마주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샌가 아카시의 어깨 위로 올라가 아카시를 계속 당겨 안고 있었다. 아카시의 손은 내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위아래로 들었다 놓듯 크게 움직였다.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에 아카시의 혀를 세게 빨아들였다. 그러자 움찔한 아카시가 입술을 문지르며 고개를 틀었고, 이가 가볍게 부딪히는 순간 뜨거운 숨이 입가로 새어나갔다. 내가 갈무리하지 못한 침이 주륵 흘러내리는데 그걸 아카시가 빠르게 핥아 올리더니 씨익 웃었다. 아래에 피가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여기서 계속하다간 큰일 날 것 같죠?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시가 멀리 떨어져 앉았다. 아까부터 식어있던 차를 찬물처럼 들이키며 잠시 숨을 고르자 방 안에 침묵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시가 고요함을 깨고 무릎 위에 놓여있던 내 손을 끌어다 제 손에 쥐더니 꼬물꼬물 만지작거렸다. 어린애처럼 뭐하는 거야, 시선을 흘리며 아카시를 내려다보는데 아카시가 웃으며 손등에 키스했다. 정말 좋아해요, 마유즈미 선배.

  아, 정말이지. 다시 떠올려봐도 첫 키스를 너무 야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카시는 이게 첫 키스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첫 키스를 저렇게 잘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아카시가 처음이라고 우겨도 절대 믿어주지 않으리라. 처음이라기엔 혀 놀림이 너무 능숙했다고. 그런데 아니 잠깐, 아카시니까 말이 될지도 모른다. 키스도 철저하게 예습해오는 모범생인 거야, 아니면 하늘이 내린 키스에키노 세대인 거야? 키스에 대한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킨 탓에, 스페셜 디너에 걸맞게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가 내 코로 들어갔는지 귀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체하진 않았지만, 차라리 체한 것이 나았을 만큼 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필터링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동안 유지해오던 독백 컨셉이 무너졌다. 다음 데이트의 행선지로 아쿠아리움은 어떻겠냐는 아카시의 말에 다음 데이트는 내 자취방에서 하지 않겠냐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갔다.

  “자취방이요?”

  후식을 스푼으로 떠올리고 있던 아카시의 손이 멈췄고, 우리 사이에는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좋아요.”

  아, 젠장.

 

 

* * *

 

 

  교토의 국립대 공학부에 합격했다. 서브컬쳐를 본격적으로 즐겨볼까, 도쿄의 사립대에 지원할 생각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회사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으려면 국립대가 유리하다기에 별 미련 없이 교토에 남았다. 대신 졸업도 하기 전에 일찍부터 대학 근처 자취방을 계약했고, 기숙사에서 조금씩 짐을 옮기다 보니 졸업 즈음에는 이미 나만의 공간이 완성되어 있었다. 3년간의 기숙사 생활 덕분에 새로 시작된 자취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절감된 학비 대신에 더 풍족해진 용돈을 써서 모든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하면 요리로 고통받을 일도 없었다. 2인 1실이었던 기숙사보다 더 독립적인 기분을 맛볼 뿐이지,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유유자적 해피 솔로 라이프였다. 졸업식 날 아카시의 고백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전까지 자취방에 누구도 초대해본 적 없었다. 내가 먼저 초대를 했고, 뇌가 제정신 스위치를 올리기 전에 재빨리 아카시가 승낙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것은, 그때 아카시는 내 제안을 분명 ‘아카시, 자취방에서 나를 엉망진창으로 범해줘!’라고 받아들였을 거란 말이다. 아니 물론 정말 솔직한 본질만 논하자고 한다면 그 문장이 오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 부분 점수는 줘야겠지만, 그런 뜻으로만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순간의 기분을 더듬어 유추해보자면 그때의 나는 다른 연인들이 주로 다니는 북적거리는 데이트 코스보다도, 좀 더 아늑하게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가까워진, 특별한 감정을 공유하는 단 한 사람에게 나만의 공간을 오픈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카시라서, 아카시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지난 1년간 나쁘지 않았으니까, 내 본능이 아카시를 믿었다. 결론적으로 나의 냉철하고 믿음직한 충동과 경험과 본능이 결과적으로 아카시를 유혹하는 판을 깔고 말았다. 이제 아카시가 찾아올 토요일까지 어떤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동안 인터넷에서 접했던 정보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우리가 키스 그 이상의 애정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둘 중 누군가는 자신의 신체 부위를 그동안 상상해본 적 없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내 뛰어난 촉은 첫 키스의 순간을 복기하며 그 누군가가 내가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직 아카시와 한 번도 논의해본 적 없는 주제였으나, 외면하기 힘든 가능성에 새어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스마트폰 브라우저의 시크릿 창을 열었다. 그리고 검색 사이트에 접속해서 단어를 입력했다. S, A, F, E, S, E, X, H, O, M, O, S, E, X, U, A...

 

 

* * *

 

 

  그날이 왔다. 어젯밤에 아카시와 라인으로 굿나잇 인사를 나누고 긴장감에 잠이 오지 않아 미친 듯이 인터넷의 바다를 헤매다가 결국 잠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새벽 5시가 지나서야 까무룩 잠이 들어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부스스 일어났다.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 너무 자서 부었네. 뭐 어쩌겠냐는 심정으로 샤워부스에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고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았다. 비누 거품이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각에 문득 손가락을 그 사이로 가져다 대보았다. 움찔하고 조여들었지만 결국 틈새를 열어주지 않는 그곳에서 손을 떼고 역시 무리인가 생각했다. 순간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천하의 마유즈미 치히로가 이런 일로 긴장을 하냐고 누군가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의욕적으로 연습을 시도해봤다가 몇 번의 좌절을 맛본 사람의 기분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샤워실에서 스치듯 보았던 아카시의 그것의 크기를 떠올려보면 더더욱. 오늘의 초대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날지도 모르겠다. 내 공간에서 그런 기분은 맛보고 싶지 않은데. 고개를 좌우로 털며 불안감을 떨치고 샤워를 마쳤다. 아카시와 늦은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기 때문에, 손님맞이 준비 겸 화장실과 방을 청소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 수건과 젤, 콘돔이 제대로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탕 소리가 날 때까지 제대로 밀어 닫았다. 더 할 거 없나. 침대에 앉아 시계 초침이 원을 그리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센터 시험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다고.

  - 딩동.

  약속 시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카시가 도착했다. 번호키를 미리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내 심장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사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번호를 알려줬어도 아카시 역시 벨을 누르고 내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을 것 같지만. 잡스러운 생각을 휘휘 치우며 오픈 버튼을 누르자 조심스럽게 문이 움직이고 아카시의 모습이 문틈 사이로 비친다.

 

(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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